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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Ho's Diary/이호 자서전

4.19혁명의 영속성과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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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의 영속성과 종교

 

 


 

 


Ⅰ. 시작하는 말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오면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놀은
오빠와 언니들의 피로 물들었어요.
오빠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먹고
저녁도 안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빠 아빠 아무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당시 수송국민학교 강명희 "나는 알아요" 중에서)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말 안해도"라고 외치던 한 국민학교 소녀의 눈에 비친 4.19. 그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거리에서, 우리가 4.19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은 , 그 소녀의 눈에 비친 그 자리에서 어디까지 와 있을까?
과거의 가치와 진실이 내동댕이쳐지고 과거의 오류가 거침없이 되풀이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역사에 대한 솔직한 회의와 반성 뿐일까?
"아빠, 도대체 역사란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이야기좀 해 주세요." 한 어린이가 역사가인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 것으로 시작되는 「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는 역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역사의 주장은 그 성질상 인간이다. 보다 적절히 말하자면 인간들이다. 겉으로는 차갑기 그지 없는 문서나, 그것을 제정했던 사람들과는 얼핏보면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제도의 배후에 (있는) 역사가 파악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들이다."
역사를 총체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파악하려는 블로흐의 역사관에 동의하며, 수십년이란 시간적 거리를 잇는 가교가 '인간의 보편적 지향성'임을 믿으며, 4.19혁명의 현재의 의미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Ⅱ. 세계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으로 본 4.19혁명 
 
1. 세계사의 공유원리
4.19혁명은 하나의 역사적 과거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수십년이란 시간적 여백을 가지는 그것이 현재와 관련지어 해석되어지고 미래와 연결되어야함은, 그것이 인류역사의 시작이래 단절되지 아니하는 하나의 큰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4.19의 근대적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갑오농민전쟁이, 아직 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였지만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의 한반도를 중심한 각축으로 세계사의 변동을 예고한 이후, 4.19혁명은 현대세계사에 있어서의 변동의 한 시발점이었다.      
<한국의 대학생을 배우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멘데레스」독재정권의 타도를 성취한 터어키 학생혁명을 필두로, 세계는 학생혁명의 계절을 맞이하게 된다. 이는 4.19혁명이란 동북아 한 후진국에서 벌어진 한 사건속에 세계사가 추구하는 공유원리가 있었다는 실증적 증거가 되고 있다. 그러면 그 공유원리는 무엇인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회복'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지향성이 그것이다. 4.19혁명은 세계사속에 함축되어진 이 공유원리의 돌출이었다.
미국의 대표적 일간지 중의 하나인 '워싱턴 포스트'지 1960년 5월 5일자 기사는
"한국은 어떤 침략에도 대항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인간적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갈구를 무시하는 어떠한 정부에도 항거하기로 결심한 국민을 가지고 있는 나라로 상징된다"라고 쓰고 있다.  
 
2. 공유원리의 한국적 전개과정
세계사의 공유원리가 세계사의 한 특수성인 한국사에 있어 어떻게 전개 발전되어 왔는가?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획득이라는 세계사의 보편성과의 조우를 위한 한국의 민중적 각성의 연원을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잡을 수가 있다. 갑오농민전쟁이, 민중의 생존문제에 기인한 사회경제적 측면과 척양왜창의(斥洋倭唱義)로 대변되는 외세의 충격을 극복하려는 정치지향적 명분에 천착하고 있지만, 그 이념적 구심체가 동학이라는 민족종교였다고 하는 점에 유의하게 된다.
갑오농민전쟁은 한국현대사의 커다란 과제, 즉 민중주체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이는 집권층의 통치이데올로기화를 위한 작위적 국가민족주의, 국가민주주의와는 대칭되는 개념)의 근원이 되었다. 그러나 갑오농민전쟁의 좌절은(외형상) 민중주체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긴 동면을 가져오게 된다. 그후 1919년 3.1독립운동은 민중주체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의 부활이었고 성숙이었다.
또한 3.1운동의 이념적 구심점의 역할을 기독교, 천도교, 불교 등 제종교가 감당하고 있었음은, 한국민중운동의 단초가 되었던 갑오농민전쟁에서의 동학의 역할과 같았다고 하겠다.  
그후 1945년 한국의 해방은 한국민중의 주체적 역량이 외세와 날카롭게 맞부딛히는 시험의 장이었다. 그러나 한국민중의 주체적 역량은 미성숙을 드러내어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이라는 좌절을 맛보지 않으면 안되었다. 더우기 이 분단의 과정에서 민중주체세력이 외세의존적인 반(反)민중세력에 의해 거세됨으로 말미암아 분단의 토착화를 가속화시켰고, 이는 한국민중운동에 있어서 최대의 적인 외세의존적 세력군(群)이 집권세력 내지 비호세력의 위치를 점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그런데 한국현대사의 분기점인 8.15해방에서 1960년 4.19에 이르는 기간동안, 과거 한국민중운동의 이념적 구심적 역할을 맡던 종교는 침묵한다. 그리고 4.19에 이르러서는 종교가 맡던 역할을 학생들이 떠맏게 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성서의 '말씀'이 상기되는 현상이다.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학생」이란 특별히 역사적 개념이다. 학생은 그 학생의 출현 자체가 역사의 격동과 함께 그 의미를 지닌다. 역사의 가장 첨예한 감관이어야할 종교의 역할이, 역사와 정의에 대한 순결한 헌신의 의지를 지니는 학생세력에로 넘어간 것이다.
따라서 4.19는 한국민중운동사의 자랑스런 역할을 자임하던 한국종교의 부끄러운 반성의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는 4.19이후 민중운동의 구심점이 학생들이 되었으며, 종교성이 거세된 민중운동은 자연히 총체적 인간회복이라는 민중운동의 방향을, 가시적인 물질적 조건으로 경도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Ⅲ. 민중운동의 반성으로서의 4.19
 
1. 4.19혁명의 반성에 대한 반성
서울대 백낙청 교수는 '창작과 비평' 80년 여름호<4.19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성>이라는 글에서 "집권의 욕심이 없다는 것은 학생으로서 인간적인 미덕일는지 몰라도 혁명세력으로서는 차후대책이 없다는 뜻이 되며, 경제적 이해관계를 초월하고  있었다는 것이야말로 운동의 영속성이라는 면에서 가장 치명적인 약점인 것이다"라고 하면서, 4.19의 혁명적 차원을 중시하되 그 한계를 잊지말자는 뜻과 4.19의 현재성을 강조하는 뜻에서 4.19를 「미완의 혁명」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백교수의 주장은 오늘날 한국지식인들 특히, 대학인들의 4.19인식을 대변하는 논리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학생들이 즐겨 4.19를 「미완의 혁명」으로 부르면서 사회과학적 인식의 부족을 4.19혁명의 반성으로 삼고 있음이 그 증거다.
그러나 이러한 4.19의 인식과 평가에는 중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즉 혁명의 영속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그 영속성의 동인(動因) 을 물질적 이해관계로만 설명함으로써 스스로 혁명의 영속성에 대한 한계를 드러내는 자가당착의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백 교수의 이야기는, 물질적 이해관계에서 기득권을 획득한 혁명세력은 그 기득권을 향유하기 위하여 혁명의 영속성에 동참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나. 이는 극히 단순논리이며 과거혁명사에 대한 몰이해의 소치라 하겠다.
지금껏 역사상에 나타난 혁명중, 그것이 정치적 권력이나 물질적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성공했다고 평가될 수 있는 어떤 혁명의 세력도, 그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하여, 민중의 열망인 인간보편성을 향한 영속성 혁명에 동참한 예가 전무하다. 오히려 그것이 물질적 이해관계를 중심한 정치혁명에 머무는 한, 그 혁명세력은 반 역사적 길을 갔으며 반동세력화했던 것이다.
오히려 4.19혁명의 한계를 논할 때는, 한국근대민중운동사의 단초인 갑오농민전쟁에서부터 보여주는 민중운동의 이념적 구심체로서의 종교성이, 4.19혁명에서는 보여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해야할 것이다.
물론 이 종교성은, 현실이해에 있어서, 사회과학적 인식을 한면(面)으로 하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어야 할 것이다.
 
2. 영속혁명을 위한 가치체계
한국근대사를 가로지르는 '갑오농민전쟁'의 좌절은--단지 외형상의 좌절이라 보지만--외연적으로는 강력한 외세와 집권세력의 강압이 그 원인이었지만, 내재적으로는 동학과 당시 민중운동의 지도자들의 민중의식을 주도할 가치체계, 즉 혁명철학의 빈곤을 들 수 있다.
갑오농민전쟁이후 한국근대사가 백암 박은식이 지적한 대로 혈사(血史)와 통사(痛史)로 점철된 것은, 한국역사가 인간의 존엄성과 진정한 자유의 획득이란 인류보편성을 향한 영속혁명의 철학을 찾는 풀무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한국근대사의 수많은 좌절의 기록이 결코 좌절이 아닐 수 있는 이유이다.
예수의 죽음에 대해,  33세 한 무명청년의 덧없는 죽음으로 보는 자에게 예수의 십자가는 실패이나,  예수의 삶과 정신을 믿는 자에게 예수의 죽음은 영원한 승리를 위한 일시적 좌절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면 한국근대사를 통하여 형성되어진 혁명철학은 무엇인가? 저명한 종교학자 엘리아데(Mirced Eliade)교수는, 세상을 "속(俗)" 된 것으로만 보는 것은 "세속화"된 현대인에게 생긴 병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성(聖)"이라는 개념을 타계로 보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경험을 분명하게 하거나 제한하거나 변화시키거나 변형시키는 "초경험적(trans-experiential)"  기능이라고 설명한다.
이 초경험적 기능을 어떤 이들은 '민중의 보편적 의지'로, 어떤 이들은 '신의 역사개입'으로 설명한다. 그것이 어떻게 표현되어지든, 인간의 삶의 기록인 역사는 각 사람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상호자각하며 정신적-물리적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총체적 인간'의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음은 점점 자명한 사실이 되어가고 있다. 영속성 혁명을 위한 가치체계는, 인간으로 하여금 매순간 어떤 결단을 촉구하는 제반 상황속에서 이  초경험적 기능을 발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치체계는, 인간이 구체적인 삶의 가장자리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보편성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가치체계는 이미 한계점을 노정한 기존의 제(諸)가치체계를  뛰어넘는 것이어야 한다.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근대의 대표적인 두 가치체계였던 기독교와 공산주의를 놓고 "인간의 생활조건의 변화없이 자아와 인격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것은 크리스챤이 버려야할 환상이다. 그 반면에 인간을 변화시킴이 없이 생활조건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물주의적 환상으로 공산주의자들이 버려야할 환상이다"라고 주장했다.  양자에 대한 이러한 지적은.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에 입각한 총체적 인간을 지향하는 혁명철학이 어떠한 가치체계이어야 할 것인가를 예시해 주고 있다 하겠다.
신학자 하비콕스(Harvey Cox)는 이러한 가치체계가 실용성 있는 혁명철학이 되기 위해서는 네가지 필수적 특징을 보이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첫째, 그것은 왜 지금 행동이 요구되는가 하는 인식을 포함해야 한다.
둘째, 왜 지금까지 사람들은 행동하지 않았으며 지금도 행동을 거부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포함해야 한다. 즉 그들이 보지 못하고 움지이지 못하는 데에 대한 해명이 있어야 한다.
셋째, 어떻게 사람이 변할 수 있나, 즉 어떻게 그들로 하여금 경화된 실신상태에서 깨어나서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자극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견해를 피력해야 한다.
넷째, 그것은 대이변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of Catasrophe)에 있어서 합리성에 기초해야 한다.

Ⅳ. 맺는 말
 
4.19혁명은 자기의 족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국의 민중사라는 특수성의 족보이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회복이라고 하는 세계사의 보편성의 족보이다.
4.19혁명은 역사의 한국민중사라는 특수성에 담긴 세계사의 보편성을 전면으로 부상시킨 선포적 성격을 가진다. 그러나 한국민중사에서 보여주는 총체적 인간 실현을 위한 종교성이 나타나지 못했고, 전통계승의 단절이란 숙제를 남긴 혁명이었기에,  혁명의 영속성을 위한 새로운 가치체계를 찾지 않으면 안될 책임이 주어진 혁명이라 하겠다.
이러한 4.19혁명에 대한 이해의 터 위에서, 인간의 보편적 지향성인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의 회복이라는 영속적 혁명을  위한 새로운 가치체계의 발견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속에
그들의 피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봄을 선구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수유리 4.19기념탑 비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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