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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Ho's Diary/이호 자서전

80년대 논문--Christian과 Marxist는 영원한 평행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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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추억의 논문----크리스챤(Christian)과 마르키스트(Marxist)의 대화

 

     Christian Marxist 영원한 평행선인가?

 


 

[1]

언젠가 역사가  토인비(A. Toynbee) 역사적 전망이란 흐르는 강물위에 배를 띄워 놓고 배위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같은 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크고 확실하게 보이던, 지금의 가까운 풍경은 차차 멀어져 아득해지고, 지금껏 보이지 않던 풍경이 점점 가까와지고 선명해지듯, 역사의 전망이란 새롭게 전개되는 파노라마 것이다.

 

 1848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이후 100여년만에 공산주의는 세계인구의 1/3 해당하는 사람들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배하며 헌신적 충성을 요구하는 대용종교(代用宗教) 되어 버렸다. 숭배자의 숫자로 따지면 마르크스는 예수, 마호메트에 대응하는 종교적 존재로서, 모스크바를 비롯한 세계일부에서는 성자(聖者), 어떤 곳에서는 십자가형() 처우를 받고 있다.

 

프랑스 공산당의 이념적 지도자로서 기독교와의 대화의 창구였던 로제르 가로디는 대화시도의 이론적 근거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지구상에 있는 나라들은 크게 나누어 두개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수억의 사람들은 생사(生死) 뜻과 역사(歷史) 뜻을 종교에서 찾는다. 다른 수억의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를 통해 세상에서 희망을 실현하고 역사의 뜻을 찾으려고 한다. 따라서 신을 믿는 사람들을 배반하거나 그들을 제쳐놓고 인류의 미래를 건설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하면서 그들을 제쳐놓고 미래를 건설할 수도 없다. ”

 

과연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저주의 시대 끝나고, 때의 필연으로 대화의 시대 열릴 것인가?

 미국의 신학자  Charles West 얘기대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양자의 해후속에서 () 역사하고 있는가?

 

아직은 희미한 미래, 불투명한 내일에 던져진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운명에 대한 조심스런 질문을 던져보고자 라는 것이 졸고(拙稿) 목적이다.

 

[2]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는, 라인홀드 니이버와 Van Leeuwen 주장한 대로, 기독교 문명의 세속화된 산물로서 간주되어 왔다.

마사리크 다음과 묘사하고 있다.----“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발전은 진보에도 불구하고 출발점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구약성서의 관점이다. 마르크스는 원시의 낙원을 믿으며 장래의 낙원을 믿는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대 전체는 단순히 하나의 과도기에 불과하다. 공산주의의 아담 낙원으로부터 축출되었으나, 다시금 그곳으로 복귀하여 구원받는 것이다.”

 

한편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종교 저자 니콜라이 베루자예프는 크리스챤의 세속적 책임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관계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공산주의는 크리스챤에 있어 극히 특수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크리스챤이 자신들의 의무를 태만히 하고 그리스도적 사랑을 실현하지 않았던 사실을 생각하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적 정의(正義) 오늘날까지 세상에 실현되지 않았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챤의 자기 희생의 능력과 열의는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훨씬 뒤떨어지는 것이다.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길을 전하는 위대한 성인이나 수도자의 모습은 과거로 사라지고, 지금은 기독교야 말로 비영웅적 타락의 시대에 처해 있고 그리하여 공산주의의 성공을 초래케 했다. ”

 

신학자 바르트( K. Barth) “Ludwig  Feuerbach” (1826)라는  논문에서 교회가 마르크스보다 앞질러서, 하나님의 인식이야말로 바로 모든 우상으로부터의 해방을 자동적으로 의미하다는 사실을 밝히고, 아울러 확인했어야. 만약 그렇게 수가 있었다면 어떠했을까? 사회주의의 무신론적 입장은 과거나 현재를 막론라고 교회에 대한 하나의 경고가 아닌지이에 대하여 교회는 위선자처럼 격분하기 보다는 오히려 참회해야할 것이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확실히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적 이념은, 부르죠아지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고,  Hegel () 이상주의와 동일시되는 기독교, 땅의 복음을 상실한 기독교에 대한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럼 무엇이 땅의 개척자로서의 기독교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6:10)— 변하게 하였는가?

 

기독교의 원시교단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역사적 전망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급박한 도래로서의 역사의 묵시록적 종말을 내다본 것이었다. 예수는 바로 왕국의 도래를 위하여 십자가를 졌으며, 신국(神國) 도래는 바로 예수의 재림( Parousia)” 동일시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절대로 타계적(他界的)내면적(內面的) 것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역사와 사회에 대한 사회신앙적 요소가 강했다.

 

이러한 종말사관은 후에 이중적(二重的) 모델로 정형화(定型化)되었다.

역사의 궁극적인 종말인 신국(神國)” ()궁극적인 종말인 천년왕국(千年王國)”으로 정형화되었던 것이다.

 

신국(神國) 역사의 종말(the end of history)이고, 천년왕국(千年王國) 역사안에 있는 종말이다.

 

천년왕국의 상징이란 그들이 역사(全歷史) 기간이라 믿었던 6천년의 최종기간인 1천년간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들에게 역사의 궁극적인 종말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너무나 아득하게 멀기 때문에, 가까운 천년왕국(千年王國) 필요했다.

 

신국(神國) 상징은 보다 보다 개인적내면적 신앙이고, 천년왕국(千年王國) 보다 사회적외면적 신앙내용이다.

 

그러기에 교회사() 있어서 혁명신앙의 동력이 것은 신국(神國) 상징이 아니라, 당연히 천년왕국(千年王國)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중적(二重的) 모델이 변질되어, 초월적 신국(神國)이라는 일방적인 것이 되고 신국(神國) 개인적내면적인 () 만이 논의될 , 종말신앙이 지니고 있는 혁명적 활력은 거세될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예수의 재림의 지연( delay of parousia), 생동력있는 기다림의 신앙 자리에 제도적행정적인 종교, 특수화된 교단이 들어서게 했고, 그리고 그것을 합리화하고 절대화하는 기능으로서의 교리와 신학이 생겼다.

 

땅에 오실 메시아 천상(天上) 그리스도, 교체될 질서의 교두보로서의 혁명세력이  Status Quo 재가자(裁可者)로서의 교회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더우기, 예수의 재림의 지연과, 신국(神國) 도래의 비전이 사라지면서, “콘스탄틴 기독교, 현상유지, 자기합리화, 자체방어를 위하여 교회와 사회사이에 담을 쌓고, 그것을 높게 두텁게 하는 일에 전력하는 기독교로 전락하게 되었던 것이다.

 

혁명적 활력이 거세되고 땅의 개척자로서의 책임감을 상실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마르키시즘( Marxism) 실의와 고독, 니힐리즘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참여 만족감을 심어 주었다.

 

또한 역사결정론( 歷史決定論)각한 현실비판과 충만한 사회혁명적 열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헌신의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었으며, 대용종교(代用宗敎)사이비 메시아이즘의 광신성을 띠게 되었다.

 

하바드 대학 소련문제 연구소의 다네엘즈(Robert V. Daniels) 교수는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유사성을 다음과 같이 예시하고 있다.

 

 

[기독교]                          [공산주의]  

 

           예수-----------------------------------------마르크스

           히브리예언자---------------------------공상적 사회주의자

           St. 바울------------------------------------레닌(교조적[敎條的]으로)

           콘스탄틴-----------------------------------레닌(권력적[權力的]으로)

           아리우스-----------------------------------트로츠키

           교황청---------------------------------------스탈린과 후계자들

 

                         역사이론

           에덴동산-----------------------------------원시공산사회

           타락------------------------------------------계급사회의 시작, 계급투쟁

           세속도시-----------------------------------계급사회(봉건, 자본주의)

           심판일-------------------------------------프롤레타리아 혁명

           하나님의 나라-------------------------공산사회(共産社會)

 

따라서 다니엘즈 교수는 마르크스의 역사이론과 이에 입각한 공산주의 운동은 종말론적 (終末論的) 가설처음과 마지막의 신화(神話)— 관련된 기독교 신앙의 지상판(地上版)이라고 주장한다.

 

[3]

 그럼 마르크스주의는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헤겔 법철학의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종교는 현실적인 불행의 표현이며 또한 현실적인 불행에 대한 저항이다. 종교는 억눌린 피조물의 탄식이며, 냉혹한 심장의 심장이며, 얼빠진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종교를 아편이라고 한 마르크스의 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마르크스가 종교를 아편이라고 정의한 것으로만 이해되고 있는데 자세히 전후관계를 살펴보면 그것은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

그는 먼저 종교란 ‘현실적인 불행의 표현’ 또는 ‘억물린 피조물의 탄식’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는 또한 현실적인 불행에 대한 저항(protest)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이 항거는 마르크스에 의하면, 무력하고  무실(無實)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인간의 관심을 현실세계에서 피안으로 돌리게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무력하다고 할지라도 종교가 현실적인 불행에 대한 항거로 남아있으면 아편은 아니며, 다만 그것이 얼빠진 상태의 정신이 되어 불행에 대한 의식을 마취시키면 아편이라는 것이다.

 

계속하여 그는 “인민의 환상적(幻想的) 행복으로서의 종교의 지양(止揚)은 인민의 현실적인 행복의 추진이다. 환상(幻想)을 지양(止揚)하는 것은 환상을 필요로 하는 상태를 지양하는 것이다. 종교에 대한 비판은 이 세계에 대한 비판이다. 이것은 먼저 역사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철학의 과제이다”하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과제는 결코 종교를 박멸하려는 것이 아니고, 종교가 피안(彼岸)에 그리는 그러한 사회를 차안(此岸)에 건설함으로써 종교적 환상을 불필요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레닌의 종교비판은 매우 공격적인 성격을 가졌다. 그는 말하기를 "종교는 인민을 위한 아편이다. 종교는 일종의 정신적인 '후셀'과 같아서 그속에서 자본의 노예들이 인간적인 체면을 잃어 버리고 최소한도의 인간생활을 위한 요청마저 잃어 버린다 "라고 한다.

  자세히 보면 "아편"이라는 표현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은 서로 적은 그러나 뜻 있는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마르크스는 "인민의 아편(das Opium des Volkes)"이라 표현했는데, 레닌은 "인민을 위한 아편(das Opium für das Volk)"이라고 표현했다.  마르크스에 있어서 종교는 종교는 인간이 그의 불행속에서 스스로 창조한 것이며, 레닌에 있어서 종교는 지배계급이 인민을 억압하기 위한 지배수단으로 의도적으로 인민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어쨌든 마르크스의 종교관은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그들 스스로에게 묵시적으로 인정케 하고 있다. 즉 종교가 이 현실적인 세계에서 내세(來世)에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라면 사실에 있어서 현실세계와 내세는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또한 종교가 자연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인간의 인식은 영원히 부족한 것인지 모른다. 따라서 인간은 완전한 전지자(全知者) 에 대한 신앙이 필요한지 모른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의 종교비판은 기독교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정황(情況)을 요구한다. 마르크스주의의 기독교비판에 대하여 이제 기독교는 어떠한 종교인가를 설명해서는 안되고, 앞으로 어떤 종교가 될 것인가의 결단을 해야할 것이다. 오늘과 같은 불투명한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고 미래를 바라보는 기독교의 올바른 삶의 결단만이  마르크스주의의 종교비판에 해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어떤 삶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기독교는 사실 아편이 될 수도 있고 참다운 인간성의 해방과 인간구원을 위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4]

확실히 마르크스주의는 경제적・사회적 구조를 변화시킴으로써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잘못을 범하였고,  기독교는 도덕적인 설교와 개인적인 자선과 사랑으로 역사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과오를 범했다.희망의 신학자 몰트은 "인간의 생활조건의 변화없이 자아(自我)와 인격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상주의적인 환상으로서, 이것은 크리스챤이 버려야할 환상이다. 그 반면에 "인간을 변화함이 없이 생활조건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물주의적인 환상으로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버려야할 환상이다"라고 주장한다.   

  양자에 대하 이러한 반성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제약된 대치상황에서 보다 실제적 정향(定向)을 갖춘 양자간의 비교라는 입장으로 변모되었고, 대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는 주로 4가지 전제 위에 기초하고 있다. 우선 스탈린의 죽음과 함께 비롯된 脫스탈린화, 국제정치의 긴장완화, 에큐메니칼 운동의 개방화,  교황 요한 23세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보여준 對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폭넓은 자세를 들 수 있다.

  1950년대말에서 1960년대를 마감하는 기간동안 크리스챤과 마르크스주의자 간의 대화는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문서 약 1200을 수록하여 출판된 책이 있는데, WCC에 의해 간행되었다. 봔더벤트 박사가 서술한 The Christian-Marxist Dialogue: An Annotated abibliography 1959-1969  by  A・J Van der Bent가 그것이다.   

  상당수의 로마 캐돌릭 성직자들과 소수의 신교 신학자들은 연례적 토론을 위한 모임인 "Semaine  de La pensée Marxiste"를 마련했고, 이 무렵 소개된 R. Garaudy의 저서 "이단선언에서 대화에로"(De L Anetheme au Dialogue-Un Marxiste Tire Les Conclusions du Concile)가 출판되었다. 

  1966년 바봐리아 Hurren Chiemsee에서 개최된 심포지움에서는 "Christian Humanity and Marxist Humanism"이란 주제로 토론이 있었는데, 신교 신학자 Helmut Thietcke의 마르크스주의자는 "경제인"(Homo economicus)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하나의 특징은 대화의 빈도가 많아짐에 따라 용어의 장애가 크게 문제가 되었다. 비록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고 잇으나, 그 의미하는 내용에는 상당한 거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 3월 로마에서 교황청과 미국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 사회학과   공동주체로 "비신앙세계의 문화"(The Culture of Unbelie)의 연구발표가 있었다. 저명한 신학자 및 사회학자들이 참석했는데 이중에는 버어거(Peter Barger), 폭스(H. Cox), 마티(Martin E. Marty) 등이 참석했고, Marxist로는 헝가리의 바르가(I. Varge), 만디츠(Oleg Mandic) 및 체코의 마코벡(M. Machovec) 등이 참석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화에서 발견되어지는 것은 아직도 제한되고 또 소수의 급진적 크리스챤과 수정주의적 마르크스자 사이의 대화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와의 대화에 참여했던 많은 Marxist들이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예가 수없이 많다. 체코의 가르다브스키(V. Gardavsky), 프루카(M. Prucha), 카드레코바(E. Kadlecova) 및 프로쿠페스(P. Prokupek)......

  폴란드의 유명한 Marxist로 인도주의적 여러 저서를 내고 있는 샤프(Adam Schaff)가 폴란드 공산당에서 축출되고, 프랑스 공산당의 지도적 이론가며 크리스챤과의 대화의 기수였던 가로디 프랑스 공산당에서 축출된 것은 좋은 예다.

  (cf. 유명한 신학자 마코벡도 공장직공으로 일하고 있다.)  

  기독교-마르크스주의의 대화에 대하여 "몇몇의 정찰병이 간간히 만나고 있는 현 단계이며, 이 만남은 전환의 중요한 서곡이긴 하지만, 그 앞엔 복병이 숨어있는 위태로운 시도이며, 오늘(날)의 국제정세는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라고 술회한 가로디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하겠다.

 

[5]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의 양자(両者)는 영원히 합쳐질 수 없는 평행선인가? 아니면 언젠가는 한점에서 만날 것인가?

 진정 마르크시즘이 이 땅의 복음을 상실하고 초대교회의 뜨거운 생명력을 잃어버린 위기적 상황에서 나타난 예언자적 외침의 음성이었음을 기독교가 인정한다면,또한 마르키스트들이 마르크스의 무신론이 마르키시즘의 실질적이고 불가결한 부분이 아니며 실체도 아님을 인정하고,모든 허위의식의 제(諸)관념에 대항하여 진정한 신(神)을 추구하는 예언자적 투쟁의 심연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면, 양자는 분명 한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분명 양자는 지금의 빈혈상태를 치유하기 위한 수혈이 필요하다. 첫째, 인간의 실존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다시해야만 할 때이다. 인간은 오직 노동하는 인간도, 오직 신(神)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숙명적인 피동적 존재도 아니다. 성숙한 시대, 성숙한 인간상이 절실히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과 자신의 환경을 개혁하는 혁명적 존재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고 실천해야할 크리스챤의 나타와 무능을 보았다. 또한 이에 경종을 울리고 이땅의 혁명의 복음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던 Marxism이 정치이데올로기의 수단이 되어 빚어내고 있어 엄청난 비인간화를 목격하고 있다.

  이제야말로, 전투적 휴머니즘에 입각한 사회혁명의 소리를 넘어선, 실천적이며 활력이 넘치는 혁명의 소리가 어디에선가 들려오고 있지는 않는가?

  A. Toynbee의 예언자적 음성에 다시 귀를 귀울여본다. ----"오늘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단서는 역시 아직도 기독교나 기타 고등종교의 메시지에서 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구원의 음성과 그 행위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어느 모퉁이에서 오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1982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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